1. 개요
수요일은 재택근무가 있는 날이어서 좋다. 집에서는 절대 집중이 안되는걸 알기에 일할 거리를 챙겨서 헬스장 근처 카페에서 업무를 처리한다. 아침에 운동을 끝내고 카페에 가면 오후 8시 40분쯤이어도 생각보다 카페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은 대학생이나 사무실에서 잠시 나온 직장인들일 것이다. 자주 가는 카페는 8시에 문을 여는데, 오픈 준비를 끝내고 문을 열지 않고 문을 여는 순간 오픈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카페에 들어갈 때면 항상 재고가 문 옆에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항상 가는 구석자리에는 테이블 두개와 소파가 있었다. 내가 앉았을 때 테이블의 높이가 가슴까지 와서 코드를 짜기에는 불편하지만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에는 너무 좋다. 그날도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집중이 너무 안됐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코드 두줄을 치면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앉아있는게 더 비효율적인 것 같아 카페 밖을 걷다가 서점을 발견하고는 그냥 들어갔다. 거기서 이 책을 발견하였고 내가 지금까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어느 책들과 같이 그 자리에서 1/3을 읽었다. 바쁜시기에 읽은 책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오랜기간동안 책을 읽었다. 그래도 이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빨리 독서록을 쓰고 싶었다.
2. 본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장면이든 쓸모없는 장면은 없다는 것과, 감정의 깊은 부분을 자극하는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두번째 특징은 잔인한 이야기를 다루는 추리소설에도 해당된다는 것이 게이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나에게 특히 더 큰 감동을 줬다. 소심한 이과생이 짝사랑을 하는 내용이어서 폭풍 공감을 이끌어 낸건가...?
주인공인 이시가미의 감정은 작품 내내 깊은 표현이 없다가 마지막에 쏟아져나온다. 그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여운이 아직까지 남았다. 눈물도 조금 났다... 빌려줄 사람이 있는 책인데 종이가 울어 조금은 민망했다. 공감으로 인해 눈물이 난것은 아니었다. 타고난 ISFJ인 나는 주인공에 빙의하는 능력이 있다. 그저 이시가미의 상황이 너무 슬프고 그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정말 그 방법이 최선일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시가미의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은 작품에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부분을 제일 많이 읽었다.
사람은 때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시가미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도 구원되었기에 그녀가 존재하기만을 바랬다.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의 몰입도가 높은 이유는 한 사람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 않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해준다는 것이다. 야스코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부담감을 느끼기도 하고 더 나아가 구속감도 느낀다. 자신에게 나타난 더 좋은 조건의 인연과 함께하고 싶은 욕망도 느낀다. 이 부분에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생물이다. 여기 나오는 두 천재들처럼 합리적인 판단을 하여 자신의 생존확률이 가장 높은 선택을 하는 것이 본능이다. 그렇기에 야스코의 욕구는 정말 당연한 것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나오는 야스코는 자신의 생존과는 거리가 먼 선택을 한다. 타인을 위해 희생(?) 하는 선택을 함으로서 자신의 욕구와는 반대되는 길을 택하고 야스코의 이런 모습을 보며 고통과 함께 오열하는 이시가미의 모습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충분할정도의 감정적인 파동을 준다.
7년 전 인상깊게 본 만화에서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일도 이기적인 행동일 수 있고 그렇기에 이는 호감을 받는 사람이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만화를 통해 무언가를 알게된다는 것이 어의없을 수 있지만, 나는 그 뒤로 이성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일이 매우 신중해졌다. 그래서 회사분들 중 내 성격을 아는 분들은 나를 상당이 답답해하신다. 주변 사람들은 과감하게 표현하라고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불쾌감으로 다가갈까봐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친한 후배는 불쾌감을 느끼든 말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그 말에는 공감하지 못할 것 같다. 호감가는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나에게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결국 상대방이 호감을 조금씩 표현하고 나도 호감을 조금씩 표현하면서 내 행동이 불쾌감이 아니길 바라며 관계를 천천히 발전시키는 것이 나의 방법이다. (이상 썸 8개월을 타본 사람의 변명이었습니다.) 자신에게 호감이 없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현하면서 가까워지는 사람들을 보면 그 용기에 감탄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갑자기 독후감이 신세한탄용으로 변하는 것 같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면, 어쩌면 야스코는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일 수 있다. 이시가미의 희생을 안 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괴로워할 자신의 모습을 알기에 그 괴로움을 멈추고 싶어 직접 경찰서로 간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시가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녀의 선택은 이시가미를 힘들게 했다. 이시가미는 진정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으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사랑을 한 작품 속 인물은 이시가미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는 진정으로 야스코의 행복을 빌었다. 자신의 행복이 아닌 야스코의 행복을 말이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너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사랑의 방향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주체로 생각하고 그 사람의 행복을 기준으로 행동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항상 소유욕을 동반한다. 분명 이시가미도 그런 감정이 있을 것이다. 아니 있었다. 작중에서 이시가미는 야스코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랑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새로운 남자와 함께하는 야스코의 행복한 삶을 빌어준다. 이 책의 제목에 왜 '헌신' 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시가미는 정말 헌신적인 사랑을 하였다.
당신이 행복해지지 않으면 제 행위는 전부 헌된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중학교 철학 선생님께 'AGAPE'라는 단어에대해 배운 경험이있다. 선생님께서는 이를 '조건없는, 헌신적인 사랑' 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당시 결혼정보회사에 대해 많이 접해서인지, 이혼 기사를 많이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단어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사랑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래서 그 뒤로 나를 구분하는 아이디, 이름과 같은 모든 문자에는 'AGAPE'를 집어넣었다. 아직은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한 것에 많이 슬프지만 최근에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3. 결어
게이고의 책은 언제나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게 사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수 있고 그가 전달하려는 감정에 대한 스스로의 고찰일 수 있다. 분명한 점은 한 번만 생각하고 지나갈 책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은 독자들이 같이 추리를 하게 만드는 작가라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들이 인물들을 관찰하게 만드는 작가인 것 같다. 작 초반에는 반전이나 사건의 풀이에 대한 기대감을 올려놓고 이를 충족하는 작품이었다.
감정에 대한 깊은 표현력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 내가 이시가미와 같은 상황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느끼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책은 지금까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어떤 작품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을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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